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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한국사

고려, 한반도의 새로운 통일 국가, 국제 무역의 중심 벽란도

반달 친구 2023.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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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란도
벽란도

목 차

고려, 한반도의 새로운 통일 국가, 국제 무역의 중심 벽란도

  • 고려의 삼국통일과 왕권 강화
  • 국제 무역항, 벽란도
  • 고려의 수도 개경과 사회

 

고려의 삼국통일과 왕권 강화

 

936년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각 지방의 호족들의 마음을 얻고자 그들의 딸과 혼인을 하고, 호족들에게 벼슬과 토지를 주는 등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왕건에게는 29명의 부인 사이에서 25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이 태어났습니다. 또한 왕건은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금을 생산량의 10분의 1만 내도록 하여 백성들이 더 이상 굶주리지 않도록 힘썼습니다. 왕건은 불교를 장려하며 크고 작은 절을 짓었고 불교 행사를 중요시하였습니다. 진골 귀족에게 있던 지배 세력은 지방 호족에게 넘어갔으며, 옛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고자 노력하며 북진정책으로 점차 영토를 넓혀나갔습니다. 왕건은 거란에 의해 멸망된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내려오자 모두 받아주며 하나의 민족을 이룩하게 됩니다. 고려는 스스로의 힘으로 통일을 이루었으며 실질적인 민족 통일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삼국의 문화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고려 왕건은 후대 왕들에게 전하는 훈요 10조를 남겼습니다. 훈요 10조에는 불교를 장려하고,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여 민심을 얻어야 하며, 거란을 멀리하라는 등의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고려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비안검법과거제를 실시하였습니다. 노비안검법으로 호족들이 차지하고 있던 많은 노비들을 양인으로 해방시켜 호족들의 힘을 약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통해 관리를 뽑는 과거제를 처음으로 마련하였습니다. 새로운 인재들이 필요했던 광종은 과거시험을 통해 유능한 인재를 뽑아 등용하면서 왕의 힘을 키워나갔습니다.

성종유교 정치사상을 근본 이념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됩니다. 유교는 임금과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것을 강조하는 사상입니다. 또한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12목에 지방관을 파견하고 국자감, 향교와 같은 학교를 세우는 등 유교 중심의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습니다. 성종은 중앙 정치 조직과 지방 행정 제도 등을 재정비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습니다.

 

국제 무역항, 벽란도

 

고려는 주변국인 거란, 여진, 송, 일본과 경제적·문화적으로 관계를 맺었으며 그중 송나라와 가장 활발히 교류하였습니다. 많은 상인들은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왔습니다. 개경 서쪽 근처 예성강 하구에 위치한 벽란도국제 무역항으로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개경과도 가깝고, 수심이 깊어 선박의 운행도 자유로웠습니다. 벽란도는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나루'라는 뜻이며, 이곳에는 늘 많은 장삿배와 상인들로 붐볐습니다. 송, 일본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로 가득했으며 고려는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수준 높은 문화를 이루었습니다. 주변국과의 무역은 고려의 경제 발전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송나라는 거란과 여진을 견제하기 위해 고려와 교류를 하였습니다. 송나라에서 들어온 비단는 고려에게 아주 인기가 좋았습니다. 고려는 송나라에 금, 은, 인삼, 종이, 먹 등을 팔았습니다. 그중 고려의 인삼은 질이 매우 우수하고 효과가 탁월해 가장 중요한 상품이었습니다. 고려는 송나라에 사신, 유학생들을 파견하여 송나라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벽란도를 통해 아라비아 상인들은 상아, 수정, 호박 같은 보석들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이때 고려는 아라비아 상인들에게 '코리아'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17세기 이탈리아인이 만든 지도에 고려는 'COREA'라고 표기되어 있답니다.

거란, 여진은 고려에 은, 말, 모피 등을 팔았고, 먹을 것이 부족한 거란과 여진은 농기구, 곡식, 문방구 등을 가져갔습니다. 또한 고려는 일본의 수은, 유황 등을 수입하였고, 고려의 인삼, 서적 등을 수출하였습니다.

 

고려의 수도 개경과 사회

 

개경은 고려 영토의 중심에 위치하며 사방에 산이 있어 외적의 침입을 막기에 좋은 장소였습니다. 고려의 수도 개경은 바깥에 약 23km에 달하는 나성이라고 하는 성곽으로 에워싸고 있었으며, 송악산 남쪽엔 궁궐이 있었고 그 주위로 여러 관청과 절이 있었습니다. 고려의 궁궐은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만월대'라고 불리는 궁궐터만 남아있습니다.

개경은 다양한 외국 상인들이 들고 나는 곳으로 항상 활기찬 곳이었습니다.

고려는 원나라와 교류를 이어나갔고 이에 몽골 문화는 고려에 퍼지게 됩니다. 몽골식 머리모양과 옷이 유행하였으며, 몽골식 음식인 설렁탕과 소주, '마마'나 '수라' 같은 몽골어 등도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마마 : 임금 및 그 가족과 관련된 낱말 뒤에 붙어 존대의 뜻을 나타내는 말
수라 : 임금에게 올리는 밥을 높여 부르는 말

 

이처럼 원의 풍습이 고려에 전해져 유행하는 것을 '몽골풍'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원나라에도 고려의 풍습이 유행되었으며 고려의 옷, 음식 등이 전해졌습니다. 이를 '고려양'이라고 부릅니다.

고려는 건원중보, 해동통보, 은병 등 화폐를 만들어 사용하고자 하였으나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상인들은 여전히 화폐 대신 쌀이나 옷감으로 거래를 하였습니다. 고려는 외국과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상업과 수공업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고려 왕 계보(918 ~ 1392)

 

1대 태조 왕건 → 2대 혜종 → 3대 정종 → 4대 광종 → 5대 경종 → 6대 성종 → 7대 목종 → 8대 현종 → 9대 덕종 → 10대 정종 → 11대 문종 → 12대 순종 → 13대 선종 → 14대 헌종 → 15대 숙종 → 16대 예종 → 17대 인종 → 18대 의종 → 19대 명종 → 20대 신종 → 21대 희종 → 22대 강종 → 23대 고종 → 24대 원종 → 25대 충렬왕 → 26대 충선왕 → 27대 충숙왕 → 28대 충혜왕 → 29대 충목왕 →30대 충정왕 → 31대 공민왕 → 32대 우왕 → 33대 창왕 → 34대 공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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