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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한국사

외적의 침입과 고려의 극복 1, 거란과 여진의 침입과 무신정변

반달 친구 2023.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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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외적의 침입과 고려의 극복 1, 거란과 여진의 침입과 무신정변

  • 거란의 침입
  • 여진의 침입
  • 무신정변

고려의 북쪽 위로는 거란과, 여진 그리고 송나라가 있었습니다. 당이 망하고 세력을 키운 거란은 나라를 세웠고, 926년 발해를 멸망시켰습니다. 중국은 송나라에 의해 통일이 되었고, 고려는 송나라와 활발히 교류하며 우호적으로 지냈습니다.

500여 년 동안 고려는 외적의 끊임없는 침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고려는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거란의 침입

 

거란의 1차 침입, 993년

936년 고려는 통일을 이루고 북진정책으로 옛 고구려 영토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며 북쪽 지방 영토를 점점 넓혀나갔습니다. 고려는 정벌의 대상이기도 하며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적대적 관계였던 반면, 송과는 우호적 관계를 맺고 여러 가지 교류를 하고 있었습니다.

거란은 송과 고려의 관계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하여 거란은 송과 고려의 친선 관계를 끊기 위해 고려를 침략합니다. 서희는 거란의 목적이 송과의 관계를 끊기 위함임을 알아채고, 거란의 장수 소손녕을 직접 찾아가 담판을 벌였습니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내세우며 서희는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영토를 돌려줘 성을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해 준다면 거란과 교류를 잘하지 않겠는가?" 며 송나라와 교류를 끊고 거란과 교류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에 거란은 서희의 주장을 받아들여 큰 싸움 없이 스스로 물러났습니다. 고려는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확보하며 영토를 압록강 일대까지 넓혔습니다. 강동 6주는 동쪽에 쌓은 여섯 개의 성(흥화진, 용주, 철주, 통주, 곽주, 귀주)으로 정치적·군사적·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서희와 소손녕의 대화
<출처: 초등학국사 visang>

 

거란의 2차 침입, 1010년

고려가 송나라와 계속 교류하자 거란은 또다시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잠시 개경이 함락당하며 현종은 나주까지 피란하기도 하였지만, 무신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은 거란을 끈질기게 공격해 물리칩니다.

 

거란의 3차 침입, 1018년

8년 후 거란은 전략적 요충지인 강동 6주를 돌려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거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또다시 침입해 왔습니다. 고려는 거란의 침입을 예상하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물자를 준비하며 전투를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거란은 개경을 향해 쳐들어왔고, 고려는 개경 부근의 백성들과 군인들을 성안으로 대피시키고 성 밖에는 식량과 물자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70세의 고려 장군 강감찬은 귀주에서 거란군과 맞붙습니다. 강감찬은 귀주 동쪽 벌판에서 바람이 거란군 쪽으로 불 때 화살을 퍼붓는 전술로 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를 귀주 대첩이라 부릅니다. 귀주 대첩 이후 고려와 거란은 전쟁을 중단하고 평화를 유지하며 교류하게 됩니다. 

고려는 북방 민족의 침략에 대비해 개경 바깥을 에워싸는 나성을 쌓고, 1033년 압록강 입구에서 동해안 도련포까지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며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습니다.

 

여진의 침입

 

12세기 초 부족을 통일하면서 세력이 커진 여진은 고려를 침입합니다. 처음 고려는 여진을 만만하게 보았습니다. 하지만 말을 타고 싸우는 부대가 많은 여진은 상대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윤관은 패배의 원인을 파악해 기병이 포함된 별무반이라는 특별 부대를 만들었습니다. 별무반은 말을 타고 싸우는 신기군, 보병 보대인 신보군, 승려로 이루어진 항마군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107년 별무반이 조직되었고, 별무반은 여진을 몰아내고 동북 지방에 9성을 쌓아 고려의 영토로 삼았습니다. 이후 여진은 고려에 조공을 바치겠다며 동북 9성을 돌려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동북 9성을 관리하고 지키기 어려웠던 고려는 결국 여진에게 돌려줍니다. 그 뒤로 여진은 금나라를 세우고 거란을 멸망시켰으며, 송나라를 공격하면서 영토를 넓혀나갔습니다.

윤관이 여진족을 물리친 뒤 국경선을 표시하는 비석을 세우는 것을 그린 그림으로 척경입비도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척경입비도
척경입비도 (고려대 박물관 소장)

 

무신정변

 

고려 초 지방 호족과 신라 6두품 출신의 관리들은 각종 특권을 누리며 자신들의 권력을 키워나갔습니다. 광종 때 과거제가 생겨났지만 5품 이상의 고위 관리의 자손은 음서제를 통해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관직에 올랐으며, 5품 이상의 고위 관리에게 지급하는 토지인 공음전을 후손에게 물려주며 권력과 부를 쌓았습니다.

한편 이자겸은 3명의 딸을 왕실에 시집보내며 왕보다 더 큰 힘을 가지게 됩니다. 이자겸은 왕이 되고자 반란을 일으켰으나, 부하의 배신으로 실패로 돌아갔고 왕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이자겸의 난(1126년) 이후로 문신들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무신에 대한 차별은 심해졌습니다. 문신들에게 토지를 착취당하는 등 무신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습니다. 게다가 왕과 문신들은 정사를 돌보지 않고 향락에 빠져 지냈습니다. 분노를 참지 못한 정중부, 이의방을 중심으로 한 무신들은 문신들을 살해하고 18대 의종을 왕위에서 쫓아냅니다. 그들은 의종을 거제도로 유배 보내고 명종을 허수아비 왕으로 옹립하였습니다.

11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나고 100년 간 무신 정권이 이어지게 됩니다. 권력을 잡은 무신들은 백성들을 살피기보다 자신의 재산을 늘리며 세력을 키우기 바빴습니다. 망이·망소이 형제가 과중한 세금을 견디다 못해 봉기를 일으켰고, 노비 만적은 신분 해방을 외치며 들고일어났습니다. 무신 정권 시대 지배층의 횡포에 망이·망소이 난, 만적의 난 등 전국에서 하층민들의 봉기가 꾸준히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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