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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한국사

외적의 침입과 고려의 극복 2, 몽골의 침략과 공민왕의 개혁 정치

반달 친구 2023.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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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외적의 침입과 고려의 극복 2, 몽골의 침략과 공민왕의 개혁 정치

  • 몽골의 침략
  • 개경환도(1270년)와 삼별초
  • 공민왕의 개혁 정치

 

몽골의 침략

 

몽골 고원에는 말을 키우며 살고 있는 여러 부족들이 있었습니다. 칭기즈칸은 몽골의 여러 부족을 하나로 통일하며 세력을 키워나갔습니다. 칭기즈칸의 대외 정복으로 몽골은 점차 거대한 제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몽골은 고려 등 주변국에게 물자를 바치라 요구하였습니다. 몽골은 30년 간 7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하였고 고려의 저항은 계속되었습니다.

 

1차(1231년), 고려에 물자를 바칠 것을 요구하기 위해 몽골의 사신 저고여가 고려에 왔습니다. 몽골은 막대한 공물을 요구해 왔고 몽골 사신은 몽골로 돌아가는 길에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몽골은 이를 구실 삼아 고려를 침략합니다. 

몽골이 처음 침입하였을 때 박서귀주성을 지켜내며 몽골의 기병 부대를 막아냈습니다. 당시 최고 집권자였던 무신 최우는 처음에는 몽골과 타협하였으나 몽골의 간섭이 심해지자 싸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1232년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몽골과 싸울 준비를 하였습니다. 몽골은 바다가 없는 나라로 말을 타고 싸우는 민족으로 바다에서의 전투가 약할 것을 예상하고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것입니다. 강화도에 궁궐이 지어졌고 왕과 귀족들은 강화도로 이주하였습니다. 몽골의 침입은 계속되었고 육지의 백성들은 고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러한 힘든 상황에서도 백성들은 스스로 몽골에 대항하며 맞서 싸웠습니다.

 

2차(1232년), 승려 김윤후의 활약으로 처인성에서 적장 살리타를 죽이고 고려군은 크게 승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충주성에서도 "공을 세우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내릴 것이다."라고 하며 노비들에게 노비 신분을 벗어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자 사기가 오른 고려군은 몽골군을 격퇴시켰습니다.

고려가 오랜 전쟁을 치르는 동안 국토는 황폐해져 갔습니다. 전쟁으로 1232년 초조대장경이 소실되고, 1238년 황룡사 9층 목탑이 불에 타 버리게 됩니다.

 

개경환도(1270년)와 삼별초

 

강화도로 옮긴 후로도 싸움은 계속되었습니다.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하기 어렵게 되자 고려 정부는 몽골과 강화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고려의 독립을 약속받는 조건으로 다시 개경으로 도읍을 옮기게 됩니다. 

하지만 삼별초는 이를 거부하고 계속 저항하였습니다.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근거지를 강화도에서 진도로 그리고 제주도로 옮겨가며 계속 싸웠습니다. 1273년 제주에서 삼별초는 끝까지 항쟁했으나 결국 몽골군과 고려군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삼별초는 외적에 굴복하지 않는 민족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 강화  : 전쟁을 하던 두 나라가 전투를 그치고 조약을 맺어 평화를 회복함

 ※ 삼별초 : 최 씨 무신 정권의 사병으로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는 특수 군대로 편성되어 마지막까지 몽골에 저항하며 투쟁함

몽골의 침입과 삼별초의 이동경로
몽골의 침입과 삼별초의 이동경로

이후 고려는 국력이 급격히 약해졌습니다. 무신 정권은 무너지고 문신 세력이 정치를 주도하게 됩니다. 끈질긴 투쟁으로 나라는 유지했지만, 고려는 몽골의 간섭을 80여 년 동안 받게 됩니다. 몽골은 원으로 나라 이름을 바꾸었고 중국 대륙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고려 왕은 원나라 공주와 혼인을 하며 고려는 원의 사위 나라가 되었으며, 고려의 왕을 황제라 부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매년 금, 은, 매 등 각종 특산물을 원에 바쳐야 했고 공녀까지 보내야 했습니다. 원나라는 화주에 쌍성총관부, 서경에 동녕부,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우리의 영토를 빼앗았습니다.

 

공민왕의 개혁 정치

 

공민왕 역시 원나라 공주와 혼인한 뒤 고려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중국 대륙에 변화가 나타나며 원나라의 힘이 약해져 갔습니다. 지금을 기회로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아나 자주적인 나라를 세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몽골식 머리 모양과 옷을 금지하는 등 몽골식 풍습을 버리고 고려의 전통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원나라에게 빼앗긴 철령 이북 땅도 되찾았습니다. 

공민왕은 원에 의해 설치된 정동행성을 없애고 친원파를 몰아내는 등 개혁 정치를 펼쳤습니다. 또한 토지와 노비 문제를 해결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편안하게 하려고 힘썼습니다. 신돈을 책임자로 전민변정도감을 만들어 억울하게 뺏긴 땅을 돌려주게 하는 등 노력하였지만 권문세족들의 반대로 개혁은 중단되고 맙니다. 공민왕의 개혁 정치는 실패로 끝났지만, 신진사대부들 사이에서 고려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 정동행성 : 원나라가 일본을 공격하려고 설치한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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