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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한국사

고려 시대 불교의 발전과 과학 기술의 발달

반달 친구 2023.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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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부석사 소조 여래 좌상
영주 부석사 소조 여래 좌상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목 차

  고려 시대 불교의 발전과 과학 기술의 발달

  • 고려 시대 불교의 발전
  • 과학 기술의 발달

고려는 종교로서는 불교를, 정치사상으로는 유교를 바탕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성종 때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바탕으로 유교 정치를 시작하였습니다. 개경에 국자감을, 지방에는 향교를 설치하여 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후에 국자감은 성균관으로 이름이 바뀌게 됩니다. 고려 사람들은 불교, 도교, 유교 등 다양한 종교와 사상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역사서도 편찬하였습니다. <삼국사기>는 1145년 김부식이 완성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삼국과 통일신라의 역사를 사실적으로 기록한 책입니다. 1281년 무렵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는 불교 관련 내용과 고조선의 건국 신화부터 삼국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없는 발해와 가야의 역사도 적혀있으며 전설, 설화, 풍속 등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까지도 정리되어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인쇄술뿐 아니라 화약 제조 기술도 발달하게 됩니다.

 

고려 시대 불교의 발전

 

태조 왕건은 불교를 권장하며 연등회와 팔관회 등 불교 행사를 크게 열었습니다. 연등회는 전국 곳곳에 연꽃 모양의 등불을 달아 부처의 가르침이 널리 퍼지길 기원하는 행사이며, 팔관회는 개경과 서경에서 열리는 행사로 불교와 전통 신앙이 어우러진 가장 큰 국가적인 행사입니다. 용신, 해신, 하늘신, 산신 등 여러 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나라의 평안을 빌었습니다. 팔관회는 송, 여진 등 여러 나라의 상인과 사신들이 참석하여 축하인사와 선물을 바치는 등 대규모의 국제적인 행사였습니다. 

고려 시대 불교는 나라의 보호와 지원을 받으며 발전해 나갔습니다. 승려가 되기 위해선 승과라는 과거시험도 보아야 했습니다.

대각국사 의천은 11대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승려가 되었습니다. 송나라로 건너가 불교를 공부하고 약 1년 후 고려로 돌아와 불교 관련 책을 모아 불경을 정리하였습니다. 의천은 천태종을 창시하였고 속장경을 간행하였습니다. 의천은 화폐를 만들어 사용할 것을 건의하였고 해동통보가 만들어졌습니다. 영통사 대각국사비에는 불교계의 통합을 위해 노력한 의천의 일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속장경
대장경에는 부처의 말씀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불교 경전이 들어 있습니다. 고려 시대 거란의 침입을 부처의 힘으로 막기 위해 처음으로 대장경을 만들었습니다. 의천은 처음 만든 대장경에 빠져 있는 불경을 모아 속장경을 간행하였습니다.

 

고려 왕실과 귀족, 지방 세력은 절, 불상, 탑을 적극적으로 제작하였습니다. 하여 불상의 규모와 재료, 형태가 다양해졌습니다. 대표적인 불상으로 하남 하사창동 철조 석가여래 좌상,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영주 부석사 소조 여래 좌상 등이 있으며,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은 높이가 약 18m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불 입상입니다.

또한 석탑으로 평창 월정사 8각 9층 석탑, 개성 경천사지 10층 석탑 등이 있고, 수월관음도 등 불화도 제작하였습니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 등 사찰도 많이 지어졌으며, 이 절들은 고려 때 나무로 지어진 대표적인 건축물입니다. 무량수전에는 소조 여래 좌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이처럼 고려 시대에는 불교 문화가 꽃피면서 불교 사상이 발달하였고 불교 문화유산도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고려 시대 절은 종교 활동뿐 아니라 경제 활동도 이루어졌습니다. 절은 농민에게 땅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곡식이나 돈을 받았습니다. 절은 나라로부터 받은 땅에서 농사를 지어 파는 등 경제 활동을 하며 많은 재산을 쌓았습니다. 곡물뿐 아니라 옷감, 소금, 기름, 벌꿀 그리고 술도 만들어 팔았습니다. 절은 위치상 마을과 떨어져 있어 사람들은 잠잘 곳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라는 숙박 시설도 운영하였습니다. 재산이 늘어난 절들은 노비도 소유하게 되고 소유지도 넓혀나갔습니다. 절 소유의 땅을 표시하기 위해 경계에 장생표를 세웠습니다.

지눌은 18대 의종 때의 승려로 조계종을 정립하고 세속화된 불교를 비판하며 불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보조 국사 지눌은 독경과 선 수행, 노동에 고루 힘쓰자는 불교 개혁을 펼쳤습니다.

 

수월관음도
수월관음도

 

과학 기술의 발달

 

목화씨, 문익점 

문익점은 의복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인물로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나 당시 유명한 학자인 이곡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문익점은 과거시험을 보고 관리가 되어, 1363년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의 사람들이 목화로 옷을 지어 따뜻하게 입는 것을 보고 귀국길에 목화 씨앗을 가지고 들어옵니다. 문익점은 고향 경상도 진주로 내려와 장인 정천익과 함께 3년의 노력 끝에 목화 재배에 성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전국에 목화씨를 나누어주며 재배하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하지만 목화에서 씨를 제거하는 법과 실을 뽑는 법을 몰랐습니다. 그러던 중 지나가던 원나라 승려 홍원에게서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기계 만드는 기술을 배우게 됩니다. 

목화솜으로 실을 뽑아 지은 옷감은 부드럽고 삼베보다 제작도 쉬웠습니다. 고려 말 목화가 널리 보급되면서 기존의 삼베옷에서 무명옷으로 바뀌게 됩니다. 덕분에 목화로 옷을 지어 입고 목화솜으로 이불을 만들어 백성들도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레는 문익점의 손자 문래와 문영이 실 짜는 기계를 개량하여 만든 것으로 문래의 이름에서 변화된 것이라 합니다. 목화 재배에 성공하고 10여 년 만에 온 나라에 펴졌고 점점 발전하였습니다.

 

최초로 화약을 발명한 최무선

고려 말 고려는 왜구의 침입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고려는 배를 타고 들어오는 왜구를 막기 위해 수군을 만들었으나, 그 힘은 매우 약했습니다. 어려서부터  화약에 관심이 많았던 최무선은 화약 제조 기술을 알아내기 위해 20여 년을 연구하였습니다. 화약은 염초와 유황, 숯을 재료로 만들어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염초를 만들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원이라는 상인에게 염초 제조 방법을 배워 마침내 화약 개발을 성공하였습니다. 1377년 최무선의 건의로 화약과 무기를 만드는 관청인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화포, 불화살 등 화약 무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1380년 화포를 이용해 금강 어귀의 진포에서 500척 왜구의 배를 모두 불태우며 크게 승리하였습니다. 고려 말 최무선의 화약 발명은 고려 수군을 최강의 군대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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