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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한국사

성균관, 조선의 교육 제도와 관리 등용 제도

반달 친구 2023.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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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성균관 <출처: 역사저널 그날>

목 차

  성균관, 조선의 교육 제도와 관리 등용 제도

  • 성균관, 조선 최고의 교육 기관
  • 과거 제도

조선 시대 초등 교육 기관으로 마을에 서당이 있었고, 중등 교육 기관으로는 지방은 향교, 중앙에는 4부 학당이 있었습니다. 서당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천자문>과 <소학>을 배웠고, 향교에 들어가서는 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능력 있는 관리들을 길러내기 위한 최고 교육 기관으로 성균관이 있었습니다. 성균관은 유학 교육을 실시하며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성균관에서 일정 기간 공부를 하면 과거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조선 시대 높은 고위 관리가 되기 위해선 꼭 다녀야 하는 학교였습니다.

조선의 과거 제도에는 문인을 뽑는 문과, 무인을 뽑는 무과 그리고 기술관을 뽑는 잡과가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는 가문보다는 개인의 실력을 우선으로 관리를 선발하였습니다.

 

성균관, 조선 최고의 교육 기관

 

성균관은 수도인 한양에 설립한 최고 교육 기관입니다. 향교 또는 4부 학당에서 공부를 마치고 소과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성균관에는 15세 이상이 되어야 들어갈 수 있었으며, 정원은 약 200명 정도였습니다.

성균관에는 명륜당 좌측과 우측에 동재와 서재라는 기숙사가 있어 대부분의 유생들은 기숙사에서 생활하였습니다. 명륜당은 성균관 유생들이 수업을 받는 강당입니다. 성균관은 명륜당,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도서를 보관하는 존경각 그리고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균관에서는 유교의 기본인 사서와 오경, 그리고 조선과 중국의 법전과 역사책 등을 공부했습니다. 또한 문서별로 글 쓰는 방법과 글씨체도 익혔습니다. 유생들은 매일 보는 시험으로 일강, 주마다 보는 주강, 달마다 보는 월강까지 많은 시험을 보았습니다.

또한 성균관 유생들은 대표를 뽑고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 생활하였습니다.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수업료와 종이, 책, 붓, 음식 등 모든 것이 나라에서 제공되었습니다.

동재에 걸려있는 북은 유생들에게 해야 할 일을 알려주기 위한 것으로, 북을 한 번 치면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두 번 치면 옷을 갈아입고 글을 읽으며, 세 번 북을 치면 진사 식당에 모여 식사를 하였습니다. 진사 식당은 성균관 유생들의 전용 식당으로 아침과 저녁 식사 전에 출석 명부에 동그랗게 점을 찍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원점'이라 합니다. 

원점제도는 유생들의 성실성을 평가하는 것으로 하루에 아침과 저녁 두 끼를 먹으면 1점을 부여하는 제도입니다. 이는 출석 여부를 확인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원점이 300점이 넘어야 대과에 응시하는 자격이 부여되었습니다. 아침, 저녁 식사 전 출석 명부에 원점을 찍었다는 것은 하루종일 성균관 안에서 공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 제도

 

조선 시대에 관리가 되기 위한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과거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었습니다. 원칙적으로 과거 시험은 3년마다 실시되었으나, 특별한 경우에 추가로 실시되기도 하였습니다.

과거 시험은 문과, 무과, 잡과로 나뉘며, 문과는 양반 자제들이 주로 응시하는 시험으로 문반 관리가 될 수 있습니다. 문과는 유교 경전을 외우거나 문장을 짓는 시험으로 소과(1차 시험)와 대과(2차 시험)로 나뉘어 있습니다. 소과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졌고, 하급 관리직에 채용될 수 있었습니다. 대과는 소과 합격자와 성균관 유생들이 응시할 수 있었고, 3년에 한 번 열렸습니다. 33명만이 합격하였으며 그중 1등을 장원 급제라 합니다. 장원 급제는 가문의 영광이고 더 높은 관직을 받았습니다.  

무과는 무반 관리를 뽑는 시험으로 말타기와 활쏘기 등을 평가하여 선발하였습니다. 무과에는 주로 양반, 서얼, 상민들이 응시하였습니다. 잡과는 주로 중인들이 응시하는 시험으로 통역, 의학, 천문학을 맡아보는 기술관을 뽑았습니다. 

과거 시험은 양인(양반, 중인, 상민)이면 모두가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십 년을 공부해도 떨어지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과거 시험에 합격하는 일은 매우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니 먹고살기 힘든 백성들이 과거 시험을 보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고려 시대 지배층의 자식들은 과거 시험을 보지 않아도 관리가 되는 일이 많았지만, 조선 시대에는 그 수가 크게 줄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가문보다는 개인의 능력을 중시했으며 자신의 실력으로 관직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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