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초등한국사

임진왜란, 거북선 한산도 대첩 의병 곽재우

반달 친구 2023. 10. 2.
반응형

거북선
거북선


목 차

  임진왜란, 거북선 한산도 대첩, 의병 곽재우

  • 임진왜란의 발발
  • 이순신과 거북선 그리고 한산도 대첩
  • 의병의 활약

임진왜란의 발발

 

조선은 1392년 건국 이래 200년 동안 전쟁 없이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14대 왕 선조는 국토방위에 소홀했고 조선의 군사 조직과 전투력은 약해져 있었습니다. 한편 일본은 오랜 전쟁을 통해 100년간 이어온 전국 시대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하고, 지방 세력가들의 힘을 모아 한반도와 중국을 정복하려는 야망으로 대륙 진출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국 명나라는 농민들의 반란과 정치적 혼란으로 황제의 권위가 약해지면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을 정벌하기 위해 가는 길을 조선에게 내어 달라 요구하였습니다. 이를 거절하자, 1592년 임진년 4월 13일 새벽, 왜군은 군사 20만 명을 이끌고 부산 앞바다로 쳐들어왔습니다. 이렇게 임진왜란이 시작되었고 조선은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은 순식간에 부산진과 동래성을 함락하고 20여 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였고, 평양을 거쳐 함경도까지 침략하였습니다.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정하고 한양에서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란하게 됩니다. 그리고 명에 사신을 보내 지원군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순신과 거북선 그리고 한산도 대첩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인 이순신은 판옥선과 거북선을 만들었습니다. 거북선은 판옥선 윗부분에 튼튼한 덮개를 씌운 배로 윗면에 쇠못을 꽂아 적이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부터 이순신은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식량을 저장해 두고 군함과 무기를 보강하며 군사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육지에서의 관군은 계속 패배하고 있었지만 미리 대비한 이순신이 이끄는 바다에서 만큼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옥포에서의 첫 전투를 시작으로 사천과 당포 해전에서 모두 승리하였고 1592년 7월,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였습니다. 일본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후, 학익진 전법으로 무수한 적을 섬멸하였습니다. 학익진은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모습으로 적군을 빙 둘러 에워싸고 공격하는 전법입니다.

뛰어난 전술과 거북선, 그리고 화포 등의 무기로 조선 수군은 바다에서 벌어진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일본군이 바다로 전쟁 물자를 보급하려던 것을 차단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의병의 활약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한양을 버리고 도망을 쳤지만, 백성들은 스스로 자기 고장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병을 결성하였습니다. 의병은 스스로 외적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전국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지역의 지형을 잘 알았기에 싸움에서 유리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는 경남 의령의 양반으로 자신의 재산으로 의병을 모았습니다. 붉은색 옷을 입고 싸우는 곽재우는 '홍의 장군'이라 불렸으며, 숨어 있다가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승려 유정과 휴정은 승병을 이끌었으며, 전쟁 후에는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 3천 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무관 출신 정문부가 이끄는 의병은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부대를 격파하며 함경도를 지켜냈습니다.

옥천에서는 의병장 조헌을 중심으로 청주를 되찾았으며, 그들은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충남 금산으로 진격하였습니다. 죽기를 각오한 조헌과 700명의 의병은 끝까지 싸웠지만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에게 결국 모두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충남 금산에는 조헌을 비롯한 700명 의병의 유골이 모셔져 있는 무덤인 칠백의총이 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은 양반부터 천민까지 모두가 함께 가담하며 큰 활약을 펼쳤습니다.

 

조선왕조(1392~1910)

14대 선조 (1567~1608)
15대 광해군 (1608~1623)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