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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한국사

조선후기 정치의 변화: 비변사, 대동법, 영정법, 균역법, 탕평책

반달 친구 2024.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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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임진왜란(1592년)과 병자호란(1636년)을 겪으면서 정치, 경제, 문화 등 많은 것이 바뀌게 됩니다. 그리하여 병자호란 이전을 조선 전기, 이후를 조선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인조는 병자호란이 끝나고 정치적 안정과 백성을 위해 여러 개혁을 시도하며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였습니다. 국방력을 강화하고 조선을 안정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던 인조는 1649년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효종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봉림대군으로 불렸던 효종은 병자호란 후 대군이었을 당시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지기도 하였습니다. 효종 역시 국방력 강화를 최우선으로 군사 제도를 개혁하였고 군사 훈련을 강화하였습니다. 

 

 

비변사 

 

조선 전기에는 의정부와 6조(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나, 조선 후기가 되면서 비변사는 최고 정치 기구로 자리매김합니다. 

비변사는 성종 때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조직된 지변사재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517년 지변사재상은 비변사로 명칭을 바꾸며 임시 관청으로 독립적인 청사를 가지지는 못하였습니다. 이후 1555년 상설 기구로 전환되어 독립 관청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비변사는 변방의 군무(군사에 관한 일) 외에도 나라의 군무를 처리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등 전쟁이 계속 일어나다 보니 국방의 문제를 처리했던 비변사의 기능은 점점 확대 강화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난 후, 비변사는 군사뿐 아니라 재정, 외교 등 모든 국가 업무를 관장하게 되었습니다. 

 

 

대동법 (광해군), 영정법 (인조), 균역법 (영조)

 

전쟁을 겪으면서 백성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져 갔습니다. 나라에서는 토지 대장(양안)과 인구 대장(호적)을 다시 작성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고자 조세 제도를 정비하였습니다.

공납(지방에서 나는 특산물을 바치는 세금)은 백성들에게 가장 큰 세금으로, 가뭄과 장마 등에 의해 특산물이 생산되지 않아도 정해진 양의 특산물을 꼭 납부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서 관리자들은 특산물을 대신 납부하고 더 많은 대가를 백성들에게 받아내는 등  부정부패가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점을 개선하기 위해 대동법을 실시하게 됩니다.

 

대동법은 각 지역의 특산물을 공물로 바치는 대신 쌀이나 동전, 삼베나 무명 등의 직물 등으로 공납을 낼 수 있도록 하는 정책으로, 광해군 때 양반들의 반대로 경기도에서만 실시되다가, 이후 점차 확대되어 백 년 후 전국에서 실시하게 됩니다.   

 

또한, 집집마다 부과하던 공납을 토지에 부과하여 땅이 없는 사람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도록 바꾸었으며, 전세(토지에 부과하는 세금)도 개편하였습니다.  인조는 풍년, 흉년에 관계없이 고정적으로 토지 1 결당 쌀 4두를 거두는 영정법을 실시하였고, 영조는 군역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균역법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군대에 가는 대신 1년에 군포 2 필을 납부하던 것을 균역법으로 1 필만 납부하게 되었습니다.   

 

 

탕평책  (영조) 

 

임진왜란 무렵(14대 선조) 조선은 붕당을 이루며 정치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붕당이란, 학문이나 정치적으로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정치 집단을 말합니다. 붕당 정치 초기에는 붕당 간의 다양한 의견을 서로 존중하며 나랏일을 운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점차 견제하고 비판하며 붕당 간의 갈등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숙종 시기에는 정권을 잡은 당이 상대 당을 몰아내며 보복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붕당 간의 대립으로 조정은 혼란스러웠고 왕권은 약해져만 갔습니다.

조선 21대 영조는 붕당 간의  대립을 줄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탕평책을 실시하여 정치를 안정시키고자 하였습니다. 탕평이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게 이루어진다'라는 뜻입니다.

영조는 각 붕당의 인재를 실력에 따라 골고루 등용하면서 어느 정도 정치를 안정시켰고, 왕권은 점차 강화되었습니다. 또한 영조는 세금을 줄이는 등 민생 안정에도 힘썼습니다.

 

영조는 1742년 탕평비를 건립하였습니다. 탕평비에는 '두루 사귀면서 편을 가르지 않는 것이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요, 편을 가르고 두루 사귀지 않는 것은 곧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라의 관리가 될 성균관 유생들에게 이 같은 정신을 알리기 위해 성균관 앞에 세웠다고 합니다.

 

조선 21대 영조는 조선 시대 왕 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를 유지하였습니다. 영조는 84세까지 살았으며 51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영조의 뒤를 이은 조선의 왕은 정조로 사도세자의 아들입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아들로 아버지에 의해 뒤주(쌀이나 보리와 같은 곡식을 담아 두기 위해 나무로 만든 궤짝)에 갇혀 목숨을 잃었습니다.   

 

탕평비
탕평비

 

 

조선왕조계보(1392~1910)

 

15대 광해군 (1608~1623)
16대 인조 (1623~1649)
17대 효종 (1649~1659)
18대 현종 (1659~1674)
19대 숙종 (1674~1720)
20대 경종 (1720~1724)
21대 영조 (1724~1776)
22대 정조 (1776~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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