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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한국사

조선 후기 대외 관계 그리고 규장각, 수원 화성

반달 친구 2024.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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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대외 관계의 변화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한 뒤, 청을 배척하자는 북벌론이 일어났습니다. 효종은 군대를 강화하고 무기를 개발하며, 성을 쌓는 등 청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농민경제를 안정시키는 것이 우선이었고, 더욱 강해진 청을 상대하기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이후 조선은 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연행사를 파견하였습니다. 청의 도읍인 연경(베이징)에 가는 사신이란 의미로 '연행사'라 불렀습니다. 연행사의 사신들은 여러 나라의 새로운 학문과 선진 문물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국교를 단절하였습니다. 이후 160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시 국교를 맺자고 수차례 요구하자, 임진왜란 때 잡혀간 포로들을 돌려보내는 조건으로 조선은 일본과의 국교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조선은 일본통신사를 다시 파견하였고 300~500명 정도의 대규모로 구성된 통신사는 학문과 그림 등을 전해 주는 등, 조선과 일본 간의 문화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정조  규장각, 수원 화성

 

조선의 22대 왕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정조 역시 탕평책을 실시하여 고루 인재를 뽑아 정치를 안정시키려 노력하였습니다.

정조는 신분을 따지지 않고 능력으로 인재를 뽑았습니다. 그리고 젊은 학자들이 여러 학문을 연구하고, 나랏일을 의논하도록 규장각을 설치하였습니다. 규장각은 왕실의 학문 연구 기관이자 도서관으로 창덕궁 후원에 짓어졌습니다. 

또한,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 기반으로 왕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였습니다.

 

정조는 많은 책을 편찬하였으며, 서양과 중국의 과학 기술을 들여와 실용적인 학문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정조는 백성들이 자유롭게 경제 활동을 할 수 있게 시전 상인들의 특권을 축소하고 난전(허가 없이 길에 함부로 벌여 놓은 가게)을 허용하는 등 사회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나라에서 허가를 받은 시전 상인만이 장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여 시전 상인들에게는 허가 없이 함부로 장사하는 것을 단속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정조는 새로운 신도시를 건설하여 그곳을 상업의 중심지, 개혁 정치의 중심지로 삼으려 계획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화성을 쌓았습니다. 

정약용은 동서양의 성곽 기술을 활용하여 수원 화성을 설계하였습니다. 새로운 과학 기구였던 거중기(도르래를 이용해 적은 힘으로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리는 장치)와 녹로(도르래를 이용해 물건을 높은 곳으로 옮기는 장치) 등을 사용하여 만들었습니다. 

수원 화성은 6.25 전쟁 때 대부분 무너졌으나, <화성성역의궤>를 바탕으로 원래대로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건축 과정과 설계도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원 화성과 <화성성역의궤>는 우수한 과학 기술과 건축물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수원 화성
수원 화성 (출처: 큰별쌤 최태성의 별별 한국사)

 

 

조선왕조계보(1392~1910)

 

16대 인조 (1623~1649)
17대 효종 (1649~1659)
21대 영조 (1724~1776)
22대 정조 (1776~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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